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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백성문 변호사 프로필·별세·사망 원인·아내 김선영 아나운서

by 남쪽 서무 202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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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문 변호사 프로필·별세·사망 원인·아내 김선영 아나운서

법조계와 방송계를 잇는 존재로 자리매김해온 백성문 변호사께서 2025년 10월 31일 새벽, 암 투병 끝에 향년 52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월 2일 오전 7시, 장지는 용인공원으로 정해졌다.

고 백성문 변호사 프로필과 경력, 별세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배우자 김선영 아나운서의 흔들림 없는 지지와 애정까지 세밀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백성문 변호사 프로필 및 학력·법조 경력

학력 및 초기 이력

백성문 변호사는 서울 양천구 목동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2007년 제4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2010년부터 본격적인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학문적·법률적 배경은 그가 단순히 법률인으로 머무르지 않고 방송 해설자이자 법조 전문가로서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법조 활동

변호사로서 그는 법무법인 청목, 준경, 정향 등을 거친 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아리율의 대표변호사로 재직했다. 또한 서울지방변호사회 조기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며 법률서비스의 공공성과 조정 기능에도 기여했다. 학계에서도 그의 발자취가 나타나는데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숭실대학교 법학과 겸임교수, 이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더불어 2013년부터는 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변호사로 방송-법률 간 가교 역할도 수행했다.

방송 활동 및 대중적 이미지

그는 법조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했다. MBN ‘뉴스파이터’, JTBC ‘사건반장’, YTN 및 연합뉴스TV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에서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법률 해설과 사회 이슈 분석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유튜브 정치 토크쇼 ‘정치왓수다’ 등 신매체에도 출연하며 폭넓은 채널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법률 전문가로서 신뢰를 받을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 다가가는 법조인’으로 인식되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

백성문 변호사 별세 및 사망 원인

투병 과정

고인은 지난해 여름, ‘부비동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방사선 치료에 돌입했다. 치료 과정에서 한쪽 눈이 실명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투병 의지를 놓지 않았다. 그의 배우자는 “맨발 걷기까지 하며 사력을 다해 버텼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고인은 SNS에 “이 생일을 맞이할 수 없다는 두려움마저 있었던 힘든 투병 과정이었지만 잘 버티고 있다”는 글을 남기며 완치에 대한 내면의 결의를 드러낸 바 있다.

별세 및 장례 일정

결국 고인은 2025년 10월 31일 오전 2시 8분께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월 2일 오전 7시에 엄수되고 장지는 용인공원 혹은 용인 아너스톤으로 알려졌다. 그의 별세 소식은 법률계뿐 아니라 방송계, 일반 대중에게도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내 김선영 아나운서와의 관계

결혼 및 동반자 관계

고인은 2019년 11월, YTN 앵커 김선영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방송 활동과 사회적 관심사를 통해 인연을 맺었고, 결혼 이후 서로를 존중하며 동반자로서의 삶을 이어왔다. 배우자는 언어와 전달에 능한 여성이며, 고인은 언론·법률·사회 문제를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맡아온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사회적 의미도 컸다.

배우자의 지지와 유산

투병 기간 동안 김선영 아나운서는 SNS를 통해 고인을 ‘스트롱 맨(strong man)’이라는 해시태그로 응원하며 남편을 격려했고, “남편은 물 한 모금도 못 삼키는 고통 속에서도 와이프 끼니를 챙기던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제 아프지 않은 곳으로 가요”라는 작별 인사를 고인에게 전하며 깊은 애정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결혼 10주년에 재방문하려 했던 파리 여행 약속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고인이 남긴 ‘찬란한 시간’에 대한 언급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동반자를 넘어 서로의 삶을 비춰주는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기여 및 유산

형사 전문 변호사로서의 역할

고인은 형사 분야 전문 변호사로서 다수의 재난·사고·미성년자 문제·기업 분쟁 등에 대응하며 사회적 약자 옆에 섰다. 법률 서비스의 대중화를 위해 방송 해설 활동도 병행했고, 그 결과 ‘법조인 =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인식을 넘어 ‘현장에서 시민과 마주하는 법률전문가’로 자리잡았다. 법률 교육 현장에서도 그의 강의와 겸임교수 경험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실무적 인사이트를 제공했다.

방송 매체와의 접점

법률 전문성과 방송 능력을 접목한 고인의 활동은 대중매체에서 ‘법률 해설가’로서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여러 시사 프로그램 고정 패널 출연을 통해 복잡하고 어려운 사법·형사 이슈를 보다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했다. 이러한 노력이 법률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를 높였고, 언론·법조계 간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억될 메시지

고인의 삶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법률전문가도 인간으로서 고민하고 투병하며, 그러나 사회 앞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한다’는 메시지이다. 투병 중에도 결코 방송·사회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배우자와의 신뢰와 동반자적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중요성도 드러냈다. 별세 이후에도 그의 삶과 메시지는 법조계 후배, 방송인, 평범한 시민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결론

이번 글을 통해 고인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학력·법조 경력에 있어 경기고 → 고려대학교 법학과 → 제49회 사법시험 합격 → 변호사 활동 개시라는 흐름이 존재했고, 이어 대표 변호사 및 학계 활동까지 다방면으로 이어졌다. 방송 활동에서는 여러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으며, 투병 과정에서는 희귀암 진단 후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배우자의 지지가 돋보였다. 사망 시점과 장례 일정 역시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배우자와의 관계는 결혼 6년 만의 이별이라는 아픔에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깔려 있었으며, 고인이 남긴 사회적 기여와 메시지는 향후에도 지속해서 회자될 것이다. 또한 그의 삶은 법조인과 방송인,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며 ‘전문성’과 ‘인간성’ 사이의 균형을 고려하게 한다. 많은 이들이 고인의 열정과 도전을 기억하며 남겨진 이들 역시 그의 가치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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